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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한국을 '되찾아야 할 고향'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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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포빅에스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306회 작성일 19-07-1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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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다른 나라와 다르게 한국을 대해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비슷한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주변국을 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는 독일과 비교해보면 일본의 자세는 더욱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일본은 미국과 서구 국가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면서, 피해 당사자인 한국과 중국에는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표시한다.

이런 일본의 모순적인 태도 이면에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문화재 침탈 사업이 있었다.

일본은 자신들을 대륙에서 내려온 천손민족이라고 자처해왔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건 곧 자신들의 ‘고향’을 식민지로 만든 셈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넘어 만주를 거쳐 중국을 침략하면서 일본민족의 북방기원설로 이를 정당화해왔다.

일본은 한반도를 자신들의 고향이자 동시에 열등한 식민통치의 대상으로 봤다.

지난 100여년에 얽힌 일본인의 왜곡된 한국관은 이런 자기모순적 역사관의 산물이다.

고인돌에 묻힌 일본의 ‘인디애나 존스’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배경인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가 경쟁적으로 세계 각국의 문화재를 약탈하던 시기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도 그런 제국주의 고고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일본은 한국을 정식으로 침탈하기 훨씬 전인 1899년부터 한국의 문화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원래 일본의 한반도 조사 목적은 일본인의 기원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 활동하던 대표적인 학자가 도쿄대 인류학교실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1870~1953)다.

일본에서도 시골이었던 시코쿠 도쿠시마현 출신인 그는 정규 학교를 제대로 다녀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쿄대 인류학교실의 교수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일본 군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데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그는 청일전쟁의 전쟁터였던 랴오둥반도를 비롯하여 대만, 오키나와, 심지어 시베리아까지 사방으로 무자비하게 진출하던 일본군을 따라다녔다.

도리이는 각 지역의 원주민을 조사하여 열등한 집단과 우월한 집단을 구분하고 그 안에서 대륙을 건너온 일본인의 기원을 찾고자 했다.

일본이 섬을 벗어나 대륙 각지를 차지하는 데에 국민적인 흥분이 고조됐던 당시였기에 그의 자료는 크게 주목받았다.

도리이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자마자 1910년 조선총독부의 사이토 총독을 만나서 한국에서 일본민족의 기원을 찾는 조사를 도와달라고 설득했다.

그의 6년에 걸친 한반도 조사가 이렇게 시작됐다.

그가 한국에서 주목한 것은 함경도 지역의 석기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 고인돌이었다.

함경도 석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 한국에서 살던 ‘미개한’ 토착 한국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반면 고인돌에 주목한 이유는 미개한 토착 한국인들 사이에 살았던 ‘위대한’ 일본인의 조상을 발견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도리이는 영국의 스톤헨지와 유사한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미개한 토착 한국인과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한반도의 고인돌이 일본 규슈 일대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에 고인돌을 추적하면 위대한 일본인의 루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리이의 생각에선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이 잘 드러난다.

원래 서구에서 식민지는 머나먼 아프리카나 근동지역에서 문명의 개화가 아주 늦은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역사를 함께한 이웃이었고, 무엇보다 일본 원주민보다 우월한 일본인들의 기원으로 생각한 곳이었다.

그런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으로는 이를 어떻게 역사적으로 합리화할 것인가가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도리이 이후에 조선총독부는 북한의 낙랑군과 남한의 임나일본부를 강조함으로써 원래 한국인은 미개했고, 그들 사이로 일본민족의 기원이 된 이들이 지나갔다는 식의 억지 해석을 했다.

지금도 혐한세력이 한국을 얼토당토않게 비하하는 논리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자로서 도리이에 대한 평가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그가 일본 군국주의 신봉자였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혼란을 틈타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침략했을 때, 도리이는 ‘시베리아 출병은 인류학, 인종학 및 고고학에 대한 귀중한 기여다!’라며 감격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도리이는 제국주의의 어용 인류학자로 낙인찍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대륙의 꿈을 잊으려 하지 않은 그는 자신을 고향 도쿠시마에 북방식 고인돌 형태로 무덤을 만들어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동안 금기시되었던 그의 이름은 1980년대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부활했다.

그의 이름이 사방에서 언급되고, 심지어 ‘도리이학’(鳥居學)이라고 그의 연구를 신격화하며 따르는 연구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국내에도 도리이의 자료를 귀중한 자료라면서 분석을 하려는 시도가 있다. 물론 그가 남긴 사진과 다른 여러 자료의 학술적인 의미를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자료에 대한 평가 이전에 이웃나라를 ‘미개인’, ‘변방’으로 매도하며 제국주의적 침략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점에 대한 엄중한 평가는 필요하다.

사실 일본 제국주의에 가담한 학자는 도리이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학자적 역량이나 자료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그들을 합리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 한국과 만주에서 활동했던 모든 일본 어용학자들은 예외 없이 가치중립을 내세웠음을 잊어선 안 된다.

일본의 한반도 인식의 근원

일제는 1920년대부터 한반도를 벗어나 만주와 중국 일대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 고고학자들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했다.

바로 금석병용기와 북방문화론이 등장한 것이다.

금석병용기라는 용어는 원래 유럽과 유라시아 고고학의 용어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에 존재했던 시대를 말한다.

하지만 일제는 이 용어를 한반도에 도입하면서 한국인은 제대로 된 청동기나 철기를 쓰지 못한 열등한 인종이라는 뜻으로 곡해해서 사용했다.

쉽게 말하면,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문화에 머문 토착 한국인 집단과 민무늬토기의 청동기문화로 앞서나간 일본민족이 한데 섞여서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금석병용기설에 따르면 한반도의 발달한 모든 유물은 북쪽에선 중국 식민지인 낙랑, 남쪽에선 일본 식민지인 임나일본부의 영향이 미쳐서야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일제 고고학자들도 이미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서로 다른 시대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일본 안에서도 신석기시대인 조몬시대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 만들어낸 야요이문화가 서로 시기를 달리하며 존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가 짜놓은 금석병용기라는 틀은 해방 이후에도 30여년간 지속하였고, 한국 문화의 자체적인 발전을 부정하는 타율성과 정체성론의 기반이 되었다.

또 다른 일본 제국주의 고고학자의 관점인 북방문화론은 일본인의 기원을 한반도를 넘어 북방 만주라고 보는 이론이다.

이런 일본인들의 태세 전환은 1920년대부터 노골화된 만주와 중국 침략과 관련이 있다.

자신들이 침략해야 할 땅은 원래 일본인의 기원지이기 때문에 침략이 아니라 고토 회복이라는 억지 논리였다.

이 설은 북방 유라시아의 우월한 기마민족들은 말 타고 일본열도로 내려와 고훈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기마민족설로 정리할 수 있다.

현지인은 미개화시키면서, 그들 사이엔 위대한 일본인의 조상이 있다는 논리는 한반도에 대한 인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최근까지 한국에서도 ‘북방 유라시아는 원래 우리의 영토’였다며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 떠도는데, 사실 그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가 주장하던 침략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일본은 자신들의 이웃을 때로는 변방으로 때로는 기원지로 보면서 자신들의 침략을 합리화했다.

최근까지도 나타나는 주변 국가를 필요 이상으로 비하하는 발언의 배경에는 자신의 수천년 이웃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던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가 있다.

이런 일본의 자기모순적 역사관이 오늘날 주변 국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로 나타난 것이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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