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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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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MW73869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69회 작성일 19-04-1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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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와 키르홀름 전투

https://www.fmkorea.com/1711738999 


 폴란드-오스만 전쟁, 코침 전투

https://www.fmkorea.com/1714300271


윙드 훗사르의 몰락, 구스타프 아돌프의 등장

https://www.fmkorea.com/1716616846


북방의 사자와 브라이텐펠트 전투

https://www.fmkorea.com/1719051226


뤼첸 전투,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

https://www.fmkorea.com/172321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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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이 갓 반환점을 돈 1634년, 구교도와 신교도의 상황 모두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답이 없었다.'


구교도는 지난 16년간 합쳐서 딱 세번 진 장군들, 

요한 체르쿨라에스 틸리 백작(Johann Tserclaes)알브레흐트 폰 발렌슈타인(Albreht von Wallenstein)이 모두 사망했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임진왜란 한복판에 이순신과 권율이 모두 죽은 것이다.


그렇다고 신교도 측이 답이 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브라이텐펠트 뤼첸에서 제국군을 격파한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아돌프(Gustavus Adolphus)가 뤼첸에서 사망했던 것이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황희 정승과 장영실이 눈 뜨고 살아있는데 세종대왕이 사망한 것이다.


구교도와 신교도 모두 '내가 더 불쌍하다'며 질질 즙을 짤 여유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세 인물이 사라졌지만 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axel oxenstiernaì ëí ì´ë¯¸ì§ ê²ìê²°ê³¼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스웨덴의 명재상 악슬 옥슨쉐르나(Axel Oxenstierna, 1583~1654)

이 사람이 아니라면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은 일찍이 항복했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한 건 스웨덴이었다.

구스타프 아돌프때부터 재상을 지냈던 명재상, 악슬 옥슨쉐르나는 제국과 비밀리에 평화교섭을 이어가는 한편,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르나르드(Bernard)의 용병대를 움직여 도나우강의 주요 거점인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를 함락시킨다.


제국과 스웨덴의 평화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협상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전쟁을 지속해야 했던 옥슨쉐르나는 평화를 포기하고

1633년 독일 내 신교도 제후들을 모아 하일브론 동맹(Heilbronn League)를 결성한다.


라인강 유역과 독일 중남부, 작센, 브란덴부르크 제후들이 하일브론 동맹에 가세했으며

이들은 스웨덴에게 군사적 책무 전권을 위임했다.

프랑스 또한 비공식적으로 동맹에 참가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regensburgì ëí ì´ë¯¸ì§ ê²ìê²°ê³¼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현재 레겐스부르크 전경. 도나우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 유서깊은 구시가지와 대성당이 유명하다.



하지만 하일브론 동맹은 생각처럼 잘 돌아가지 않았다.

1633년 전역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도 한 몪 했지만, 애초에 독일 제후들과 스웨덴의 관점이 많이 달랐던 까닭이다.

스웨덴은 발트해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포메라니아를 장악하려고 했지만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독일에 또 다른 외국 세력이 들어오는 걸 원치 않았다.


1634년 4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스웨덴에게 포메라니아를 포기하라고 요구했으나 옥슨쉐르나는 가볍게 씹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들이 하일브론 동맹 회의에 참가하지 않는다.

만든 지 1년도 안돼서 신교도는 내분으로 삐걱대기 시작했다.



ê´ë ¨ ì´ë¯¸ì§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빨간 부분이 포메라니아다



한편 1634년 드디어 발렌슈타인을 숙청한 페르디난트 2세에겐 새로운 구원군이 왔다.

스페인에서 카디날-인판테 페르디난트(Cardinal-Infante Ferdinand)가 이끄는 최정예 육군이 알프스를 넘어 도착한 것이다!

- 인판테(infante)는 스페인어로 유아를 의미하지만, 왕실에선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나 공주를 뜻한다.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 인판테 페르디난트는 가족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추기경이 되어 카디날(Cardinal)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spanish-habsburg empireì ëí ì´ë¯¸ì§ ê²ìê²°ê³¼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스페인-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

로마의 트라야누스 이후 유럽 최대 판도를 이룩한 제국이었기 때문에

필립 5세는 제국을 두 개로 쪼개 통치하기 편하게 한다. 

스페인은 빨간색 영토를, 합스부르크 왕가는 진한 노란색 영토들을 통치했다. 



카디날 인판테 페르디난트페르디난트 2세의 아들 페르디난트(훗날 페르디난트 3세로 즉위한다), 두 페르디난트는

1634년 초여름부터 도나우 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한다.

이들은 1634년 7월 레겐스부르크를 재탈환하고 진군을 이어나가 8월 뇌르틀링겐을 포위한다.

뇌르틀링겐은 라인강과 도나우강, 오스트리아와 작센 가운데 위치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작센과 슈바벤, 라인강의 신교도 세력들을 공격하기 딱 좋은 위치였다.

더군다나 뇌르틀링겐은 하일브론 동맹에서도 발언권이 큰 도시여서

뇌르틀링겐이 함락된다면 하일브론 동맹은 와해될지도 몰랐다.




다운로드.png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현재 뇌르틀링겐 위치



이 당시 신교도군을 이끄는 사령관은 두 명이었다.


첫번째,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르나르드(Bernhard)는 베르나르딩(Bernharding)이라 알려진 용병대장이었다.

두번째는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 좌익을 지휘하며 대승을 이끌었던 구스타프 호른(Gustav Horn) 장군이었다.

호른은 구스타프 아돌프 바로 다음 서열에 있는 장군이었지만 라인강 근처에서 작전을 진행하느라 뤼첸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베르나르드와 호른은 혼자서는 절대 제국의 주공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병력을 합쳐

약 26,000명(보병 16,500, 기병 9,500)의 신교도를 이끌고 뇌르틀링겐을 구원하러 출진했다.



bernard of sachsen-weimarì ëí ì´ë¯¸ì§ ê²ìê²°ê³¼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gustav hornì ëí ì´ë¯¸ì§ ê²ìê²°ê³¼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왼쪽이 베르나르드, 오른쪽이 구스타프 호른이다.

둘은 생긴 것 만큼이나 성격도 큰 차이였다.



베르나르드와 호른은 A급 지휘관들이었지만 절대로 S급 지휘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의 성격이 정반대였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베르나르드는 조금이라도 각이 보이면 바로 공격하는 피끓는 장군이었던 반면

호른은 굉장히 신중하고 침착하게 기회를 보는 냉정한 장군이었던 것이다.


이 둘의 다툼을 중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하루씩 나누어 병력을 지휘했고, 여기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모든 축구팬들이 알고 있듯, A급 두명보단 S급 한명을 사는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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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뇌르틀링겐의 모습



스웨덴 군이 뇌르틀링겐에 도착했을 때는 23,000명의 제국군만 있었을 뿐 카디날 인판테 페르디난테의 군사는 조금 뒤에 있었다.

베르나르드와 호른은 뇌르틀링겐에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호른은 '6천의 지원군이 오고 있으니 걔들이랑 합류하면 우리 군대도 3만이니 그때 싸우자' 라 주장한 반면

베르나르드는 '2만 6천으로 충분하다. 하루빨리 뇌르틀링겐을 구원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기싸움 끝에 결국 베르나르드의 의견이 승리했는데, 

한 제국군 포로가 '제국군 지원군은 7,000명이다' 라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두 지휘관은 2만 6천 대 2만 7천이면 충분히 해볼만 한 싸움이라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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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하지만 호른과 베르나르드는 제국의 본의아닌 함정카드를 발동시켯다.

카디날-인판테 페르디난트의 지원군은 7천 명이 아닌 18,500명이었으며

페르디난트는 두 지휘관이 지겹도록 싸우던 사이 이미 제국군 본대와 합류했던 것이다!

제국군은 총 41,000명에 달했으며, 뇌르틀링겐을 포위했던 8천 명을 제외하면 

33,000(보병 2만, 기병 1만 3천)에 육박하고 있었다.


1634년 9월 5일 신교도군은 6천의 지원군을 포기하고 공격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떄가 신교도군이 공격할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베르나르드의 말대로 도착한 직후 공격을 시도했다면 26,000 vs 23,000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전투를 했을 것이고

(일부 병력은 뇌르틀링겐을 포위해야 했으니)


호른의 말대로 지원군이 도착한 뒤 공격을 시도했다면 32,000 vs 33,000으로 수적 열세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9월 5일에는 신교도군의 지원군만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신교도군은 26,000 vs 33,000으로 가장 불리한 전투를 펼쳐야 했다.

애초에 싸우지 않았다면 주어질 기회를 자신들의 손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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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지휘관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심정



거기다 신교도군에겐 운마저 따르지 않았다.

호른은 9월 5일 밤을 틈타 제국군을 야습하려 했지만

보병, 기병, 포병이 섞여 야영하던 신교도들이 밤새 대형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밤 사이 벌어지는 소음에 제국군은 이미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결국 1634년 9월 6일 아침, 양 군은 전투 대형으로 마주한다.

뇌르틀링겐과 스웨덴 군 사이 언덕에 포진한 3만 3천의 제국군은

언덕 아래서 깃발을 휘날리는 2만 6천의 스웨덴군을 내려다보았다.



battle of nordlingen 1634ì ëí ì´ë¯¸ì§ ê²ìê²°ê³¼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양 군의 포진

하늘색이 신교도, 나머지가 구교도다.



베르나르드와 호른은 서로 군대를 나누기로 합의했고 제국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전투는 2대2 태그매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베르나르드가 15,000명을 이끌고 좌측에 포진해 13,500명의 제국군과 교전했고

호른은 11,000명의 스웨덴군을 이끌고 알부흐(Albuch) 언덕에 포진한 19,500 스페인군과 교전했다.

베르나르드가 스페인군 우익의 시간을 끄는 사이 호른이 언덕을 올라가 고지를 탈환할 계획이었다.

양 군의 포성과 함께 뇌르틀링겐 전투가 시작되었다.



nord1.JPG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전투 시작과 동시에 기다리라는 호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군 최우익의 기병대가 스페인 테르시오로 돌격했다.

기병대는 쉽게 격퇴되었지만, 혼란을 틈타 스웨덴 보병대가 중앙의 참호를 점거했다.

하지만 호른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모래먼지와 화약 연기가 자욱한 언덕은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가 지독히 어려웠고,

서로다른 방향에서 올라온 두 스웨덴 보병대가 서로를 향해 오인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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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년 9월 6일 구스타프 호른.jpg



카디날 인판테 페르디난트는 혼란을 틈타 강력한 공격을 가하고 참호를 탈환했다.

호른이 만약 자신의 기병들을 투입했으면 공격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스웨덴 군 기병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덕 아래에서 대기하고만 있었다.

언덕 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호른은 한번만 더, 한번만 더를 외치며 보병대를 언덕 위로 계속해서 투입했다.

호른은 떡상을 기다리는 비트코인 투자자처럼 보병대를 믿고 존버하면 떡상할 것이라 믿었다.


한편 언덕 위에서는 스페인 테르시오들이 자신의 명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카디날-인판테 페르디난트는 스페인군의 최정예 보병인 스페인 테르시오 세 부대를 함께 데리고 왔다.

테르시오는 같은 지역에서 온 병종들을 한 부대로 편성했는데

독일 테르시오가 3급, 이탈리아와 왈룬(Walloon, 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 테르시오가 2급, 

스페인 테르시오가 1급으로 평가받았다.


오래된 테르시오(Tercios Viejos)로 불린 세 테르시오는 

후엔클라라(Fuenclara), 이디아퀘즈(Idiaquez), 토랄토(Toralto)의 지휘 아래

거대한 바위처럼 스웨덴 군을 밀어냈다.

이들은 브라이텐펠트와 뤼첸의 뼈아픈 패배를 설욕하고 있었던 것이다.



idiaquez tercioì ëí ì´ë¯¸ì§ ê²ìê²°ê³¼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마! 몇번 바르고 나니까 우리가 ㅈ밥으로 보이더나!



안타깝게도 호른의 스웨덴코인은 떡상은 커녕 떡락했다.

스웨덴 군은 언덕 위 제국군의 일제 사격과 대포 앞으로 열 다섯번이나 죽음의 돌격을 강행했다.

해 뜰 때부터 시작된 전투는 계속 이어졌고, 오전 10시 경이 되자 스웨덴 군은 완전히 지쳐 버렸다.

결국 지친 호른은 질서정연히 후퇴할 것을 명령한다.

카디날-인판테 페르디난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제국군의 비교적 짱짱한 기병대들이 스웨덴 군을 향해 돌격했다.

체력과 멘탈이 바닥난 스웨덴 군은 붕괴해 패주하기 시작했다.


언덕의 스웨덴군이 후퇴하는 걸 보자, 우익의 제국군도 베르나르드를 향해 돌격했다.

베르나르드의 병력도 돌격을 버티지 못했고, 광란의 패주를 시작했다.

신교도군은 대규모로 전장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nord2.JPG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마지막. 신교도가 붕괴한다.


2만 6천 신교도군은 완벽히 사라졌다.

전장에서 6천 명이 사망했고, 6천명이 부상당했으며 제국군의 추격으로 발생한 사상자는 최소 2만에 달했다.

스웨덴 군 원수 구스타프 호른도 포로로 잡혔으며, 베르나르드는 간신히 도망쳤다.

4년 만에 제국군이 거둔 대규모 승리였다.


제국 내 신교도 제후들은 더 이상의 참패가 두려워 

다행히도, 페르디난트 2세는 이번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1635년, 프라하 평화 조약(Peace of Prague)를 통해 황제는 공포에 질린 대다수 신교도 제후들과 평화를 맺었다.

프라하 협정의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다.


1. 1627년 신교도가 점거한 요지는 40년 뒤 교회에 반환된다.

2. 스웨덴의 편에 참전한 제후들은 사면되고, 칭호는 복권된다.

3. 제국 내의 무장 동맹, 외세와의 협약을 금지한다.

4. 이 조약에 서명한 제후들은 황제를 위해 군대를 파견할 의무를 지닌다.


프라하 조약으로 가톨릭 리그도, 하일브론 동맹도 사라졌다.

대부분의 제후들이 협정에 서명했고, 제국 내에서는 평화가 보장되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2세의 바람처럼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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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웠나?



스웨덴은 프라하 평화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프라하 조약에 따르면 스웨덴이 점거한 포메라니아는 브란덴부르크가 가지게 되기 때문에,

스웨덴은 왕도 죽고 군사도 날렸음에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웨덴이 너무 많은 손실을 본 것도 한 몫 했다.

옥슨쉐르나는 이겨도 거지, 져도 거지가 될 거라면 이긴 거지가 되기로 했다.



axel oxenstiernaì ëí ì´ë¯¸ì§ ê²ìê²°ê³¼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이쯤되면 이판사판이다



라인강 건너편에서도 상황이 변화했다..

아르망 장 드 플레시(Armand Jean du Plesis), 흔히 리슐리외(Richelieu)라 알려진 추기경은 

독일에 강력한 통일 세력이 등장한다면 프랑스 안보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일브론 동맹이 사라진 지금, 프랑스는 스웨덴 혼자 전쟁을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íì¼:attachment/Richelieu.jpg 덮어놓고 닥돌하다 거지꼴을 못 면한다 - 뇌르틀링겐 전투

리슐리외 추기경. 삼총사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프랑스의 황금기는 이 사람 없이 불가능했다.



1635년 5월 26일, 프랑스의 특사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수도 브뤼셀에서 왕의 전언을 전했다.

'프랑스 기독교도의 왕 루이 13세는 스페인 기독교도의 왕 필립 4세에게 선전을 포고한다.'


거대한 푸른 덩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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